기사 : 훌륭한 군마를 타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 (중세 신분 : 세습)
- 왕에게서 봉토를 하사받은 귀족들, 영주 농장 관리인 집사 : 멋진 말을 소유 가능
- 독일 하인리히 4세의 시대 (AD 1000년 경) 시작, 수백 년 동안 지속됨
- 특히 프랑스에서 발전
성채를 건설
- 산악지대, 울퉁불퉁한 암벽위에 세워져 한쪽으로만 올라갈 수 있음
- 해자(성채를 둘러싼 넓은 도랑)을 지나야만함
- 도재교는 언제라도 사슬을 당겨 끌어 올릴 수 있음-> 성 폐쇄
- 망루 : 성채 가장 깊숙한 곳, 식료품 저장소로 활용되어 최후의 침입때 기사들은 이곳에서 버텨냄
- 지하감옥 존재
- 농노(영주에 귀속)가 건설
기사단의 일원인 기사는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와 같이 자신의 힘을 통해 신에게 봉사해야 함
정의를 위해서만 칼을 뽑아야하며, 어떤 일에든 신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함
주군인 영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 영주를 위해서는 무슨일이든 해야함
난폭해서도 안되었으나 비겁해서도 안 되며, 오로지 일대일의 결투만이 허용됨
여인을 사랑하면 그녀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싸움함
=> 기사답다, 기사도
1096, 제 1차 십자군 원정 (~1099)
-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 : 팔레스타인, 아랍인(이교도)의 치하에 있음 -> 해방시키고자함
- 고드프루아 드 부용(프랑스 영주) 지휘하 도나우강을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소아시아로 건너가 팔레스타인에 도착
- 모든 기사들이 빨간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양어깨에 붙였기 때문에 십자군이라 불림
- 예루살렘 정복 십자군은 참다운 기사, 크리스트교도의 자세를 지키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를 모두 도륙, 참회를 한 후 성경의 시편을 읊으며 맨발로 그리스도의 무덤까지 순례
- 예루살렘을 크리스트교 국가로 선포,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수호자로 임명됨
- 이슬람국가 사이에 끼어있어 아랍인들의 지속적 침입 발생, 프랑스와 독일의 설교자들이 새로운 원정을 떠남
-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동양 아랍의 문화를 크리스트교도들이 접하게 됨
- 십자군 1차 원정 100년이 되기 이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 연구됨
- 아랍인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지식과 경험이 십자군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로 전파
독일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히 1세의 지배를 받음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붉은 수염) (이탈리아인 曰)
- 독일왕임에도 이탈리아 이름으로 더 언급되는 이유 : 자주 머물렀으며 여러 업적도 이곳에서 이룸
- 로마황제의 관을 수여할 권환을 가진 교황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돈이 필요했기에 지배하기를 원함
- 기사 시대 독일 : 돈 부족
- 시골 : 농노들이 주로 거주, 물물교환을 통해 손에 넣음
- 도시 : 돈이 필요 (농사를 짓지 않으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음)
- 이탈리아 : 로마제국 시대부터 돈을 사용(대도시多, 상인 발달), 도시 시민은 농노와 달리 독립적
- 바르바로사 황제 : 이탈리아또한 실질적으로 지배하기를 원함
-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 1158 법학자들을 불러모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므로 1000년 전의 모든 권리를 가진다고 공표하도록 함
- 허나 이탈리아 도시는 아무것도 공납하지 않았고, 반란의 중심지 밀라노를 집중적으로 공격, 대승을 거둠
- 이탈리아를 떠나 고국 독일로 향하자마자 허사로 돌아감. 밀라노 도시 재건, 황제 철저히 무시
- 바르바로사 6번에 걸쳐 이탈리아 출정했으나 허울뿐인 명성만 얻고 실질적 효과는 얻지 못함
- 1189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사망
프리드리히 2세
- 시칠리아에서 성장, 바르바로사의 손자
- 어린 시절, 바르바로사의 친척인 필립과 벨프 가문의 오토 사이의 지배권 싸움 발발
- 구엘프당과 기벨린당의 싸움이 오래 지속됨
- 후견인 :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크리스트교 세계의 실질적 수장, 유럽 영주또한 지배)
- 1215 잉글랜드의 존 왕, 마그나 카르타 (두 번 다시 귀족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승인
- 경호원도 거의 없이 시칠리아를 떠나 이탈리아 지나 스위스 산악지대 넘어 콘스탄츠에 도착
- 벨프가문의 오토 군대가 접근했으나 콘스탄츠의 시민 품에서 버팀
- 독일의 모든 영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하여 강력한 지배자로 부상
- 교권과 왕권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레고리우스 7세 vs 황제 하인리히 4세) 발발, 카노사의 굴욕 따위 일어나지 않음
- 세상 종교에 대한 이해가 높았으며 그들의 싸움을 이해하지 못함
- 인노켄티우스의 후임(노 현명)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십자군 참전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싸우지 않고 칼리프 및 술탄과 협약을 맺어 해결 (그리스도의 무덤까지 순례 가능, 예루살렘 일대가 크리스트교도의 영토가 됨)
- 예루살렘의 주교 불만 품고 교황에게 황제를 고발, 황제가 이슬람교도가 되었다며 그를 파문
- 시칠리아로 귀향하여 국정을 돌보고 통치권 또한 분명하게 행사
- 봉토를 내주지 않고 관리를 임명, 봉토 대신 월급을 지급함
- 사후 머지않아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 죽음
황제와 교황이 반목하는 동안 서양세계는 불행에 직면
1206 칭기즈칸, 몽골에서 권력 장악
1213 금나라 수도 연경(현 베이징) 함락
페르시아 정복, 유럽으로 향함
1241 브로츠와프(폴란드 국경 근처) 도달, 도시점령
몽골족 :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실현시킴
칭키즈칸 몽골에서 사망, 몽골 전사들 물러남. 그가 지나간 나라 철저히 폐허가 됨
호엔슈타우펜 왕가 마무리 후 독일의 혼란
- 약육강식의 시대 (불의의 시대)
- 프리드리히 2세, 바르바로사를 그리워하며 기적을 고대함
- 진정한 기사 시대 :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종말과 함께 막을 내림
1273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 영주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됨
- 스위스의 성채 이름 합스부르크 + 그의 이름 루돌프
- 가난하고 이름 없는 기사이기에 대항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선출했으나 루돌프는 매우 영리했음
- 보헤미아의 오토카르(가장 반항적인 영주)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둠, 영지 일부를 몰수
- 1282 친자식들에게 봉토로 하사 -> 오늘날 오스트리아
- 합스부르크가, 유럽에서 가장 명망 높고 영향력이 큰 영주가문으로 단숨에 부상
- 독일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가문이었으나 독일보다는 가족영지(오스트리아)에 더 자주 머뭄
- 독일에서는 공작, 주교, 백작 같은 봉건 영주들이 각자의 영토에서 무제한의 권력 휘둚
내용 출처 : <곰브리치 세계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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